뜨겁던 여름을 밀어내며 바람 끝이 서늘해진다. 하늘도, 들녘도 계절을 갈아입는 동안 바다에서도 가을이 시작된다. 살 오른 전어를 찾아 어부들은 새벽 바다로 나서고, 물이 빠진 갯벌에서는 짱뚱어와 쏙, 바지락을 거두는 손길이 분주해진다. 바다가 풍성해지는 만큼 밥상에는 그 바다를 터전 삼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도 차오른다. 고향 바다에서 새 삶을 꾸린 가족, 서로의 끼니를 챙기며 인생 후반을 살아가는 부부, 물때를 따라 갯벌을 오가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들까지... 가을 바다가 내어준 풍성한 맛과 그 안에 깃든 삶의 이야기를 만나본다.
전국에서 가을 전어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는 곳 중 하나인 경상남도 사천. 여름 동안 살을 찌운 전어는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가장 고소한 맛을 품고 사천 앞바다로 돌아오는데... 하늘도 바다도 어둠에 잠긴 새벽, 박종덕(59세), 황순애(54세) 씨 부부는 동이 트기 전 그물을 올리느라 분주하다. 유난히 덥고 가물었던 날씨 때문에 전어가 많이 잡히지 않아 걱정이었던 부부. 하지만 오늘은 아주 실한 녀석들이 그물에 제법 걸려들었다.
비토리 끝자락, 문을 나서면 바다가 지척인 곳에 터를 잡은 부부는 진주에서 살다가 14년 전 아내 고향인 사천 비토리로 귀어했다. 팍팍하고 여유 없던 도시 생활에 지쳤던 부부에게 비토리 바다는 새로운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통통하게 살 오른 전어가 돌아오는 가을이면 이들의 밥상에도 특별한 음식들이 하나둘 오른다. 육지에서는 쉽게 맛볼 수 없다는 전어밤젓은 황순애 씨에겐 어머니의 기억을 불러오는 그리운 음식이고 남편 박종덕 씨가 최고로 꼽는 건 기름에 튀기듯 구운 전어구이. 그리고 박종덕 씨의 누나 박회옥(62세) 씨가 동생 부부를 위해 정성껏 끓여주는 전어탕은 어디서도 쉽게 맛볼 수 없는 이 가족만의 든든한 가을 보양식이다. 여기에 제철 맞은 고들빼기로 담근 김치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 비토리 가족에게 전어는 가을이 데려온 반가운 손님이자, 가족을 밥상으로 불러 모으는 추억의 맛이다.
자연의 질서에는 어김이 없다. 하루 두 번 제 속살을 드러내는 갯벌은 언제 봐도 경이롭고 반가운 갯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신안군 암태도의 드넓은 갯벌을 누비는 최창규(71세)는 짱뚱어잡이 고수. 가을은 짱뚱어가 살이 오르는 계절이라 갯벌을 누비는 짱뚱어 사냥꾼도 분주해진다. 인기척만 느껴도 재빨리 몸을 숨기는 녀석을 잡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과 기술이 필요한데, 짱뚱어는 ‘훌치기낚시’로만 잡을 수 있다.
최창규, 박순옥(60세) 씨 부부가 인천 강화에서 신안으로 내려온 건 3년 전. 평생 가족을 위해 쉬지 않고 살아왔던 남편이 큰 수술을 받은 뒤, 아내는 남편의 건강을 지켜주기 위해 이곳에 살자고 했단다. 음식 공부까지 하며 남편에게 먹일 한 끼를 고민했던 아내는 남편이 갯벌에서 잡아 오는 것들로 영양 만점 밥상을 차린다.
푹 고아 부드럽게 끓여낸 짱뚱어죽부터 짱뚱어 육수를 활용한 묵, 시래기와 동과를 넣어 자작하게 조린 짱뚱어시래기동과조림. 그리고 싱싱한 채소의 껍질을 활용해서 만드는 아내의 창작 요리인 채소잡채까지... 젊은 날에는 가족을 먹여 살리느라 앞만 보고 살아왔다면 이제는 서로의 하루를 챙기며 살아가는 부부. 남편은 갯벌과 텃밭에서, 아내는 부엌에서 서로를 위한 밥상을 함께 만들어간다.
푸른 논과 푸른 바다가 맞닿아 있는 경상남도 남해군 이어마을. 물이 빠지면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호미와 붓, 통을 챙겨 갯벌로 향하는 어머니들이 있다. 남해에서는 물때에 맞춰 갯벌에 나가 해산물을 거두는 일을 ‘바래’라고 불렀다. 예전 어머니들은 갯벌에서 캔 것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장에 내다 팔아 자식들을 먹이고 가르쳤다. 바랫길은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던 길이었다.
남해 가을 갯벌의 터줏대감은 ‘쏙’이다. 된장 물을 미끼로 뿌려 쏙을 유인한 다음 구멍 속에 붓을 넣어 쏙을 잡는데, 고현면 토박이인 이경엽(67세) 씨는 머리카락으로 직접 만든 붓을 사용할 만큼 오래된 쏙잡이 방식을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 쏙을 잡고 바지락을 캐고, 갯고둥까지 줍다 보면 어느새 물이 들어오고 그제야 어머니들은 갯벌을 빠져나온다.
갯일에, 농사일에, 자식들까지 키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도 자식들 끼니만큼은 정성을 다했다는 어머니들의 음식들. 쏙에 호박과 마늘만 넣어도 맛깔났던 쏙호박볶음과 어머니가 갯일을 쉬는 날 해주셨던 쏙튀김은 그리운 추억의 맛이다. 기운 없거나 입맛 없을 땐 바지락살과 완두콩을 넣고 바지락 육수로 바지락솥밥을 짓는데, 다른 반찬이 필요 없는 꿀맛 같은 한 그릇이다.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걷고 싶다는 바래길. 이어마을의 가을 밥상에는 남해 어머니들의 세월과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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