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눈도 못 맞추던 아이가 주변을 둘러보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드러누워 울면서 떼를 쓰던 아이는 혼자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스리게 됐고, 하고 싶은 게 없었던 아이는 이제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볼 때마다 한 뼘씩 자라고 있는 아이들의 놀라운 변화에 엄마는 안심했고 선생님은 박수를 보냈다. 무엇이 우리 아이들을 이토록 변하게 만든 것일까.
늘 웃는 얼굴을 하고 다니는 고3 현준이는 게임 이름만 대면 출시 연도와 제작사를 줄줄이 읊는다. 그 옆에 꼭 붙어 다니는 정수는 출생 연도만 들으면 무슨 띠인지 술술 맞힌다. 둘은 학교에서 소문난 단짝이다. 어딜 가나 항상 손을 꼭 잡고 다니고, 수업 중에도 머리를 쓰다듬고 뒤에서 껴안는 등 애정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서로를 챙기는 모습이 보는 이에게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둘 사이를 돈독하게 해준 건 온라인 배구 게임이다. 작년에는 강원 지역 대표 선수로 전국 e스포츠 대회에서 3위까지 했을 정도로 강팀이다. 항상 덤덤한 정수는 실전에 강하지만 현준이는 경기할 때마다 감정기복이 심한 편이다. 경기가 안 풀린다고 정수에게 화를 내는 일도 잦았고, 경기에서 지면 바닥에 드러누워 울고불고 떼는 쓰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현준이는 변했다. 혼자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절제하고, 정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경기에서 져도 상대 선수를 응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생님이 굳게 믿고 있는 ‘게임의 힘’이다.
전교 1등에 전교 회장, 전북맹아학교에서는 중민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빛 한줄기 없는 캄캄한 세상에서 중민이는 늘 혼자였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었던 데다 웬만큼 공부해도 1등을 놓치는 법이 없으니 일상은 무료하기만 했다. 그러다 올해 초, 생각지도 못한 막강한 경쟁자가 나타났다. 일반 학교에서 전학 온 주영이의 등장은 중민이의 자리를 위협했다. 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계속됐다. 게임에서도 둘은 강력한 맞수였다. 그때 처음으로 중민이에게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
주영이를 이기기 위해 매일같이 전략과 전술을 고민하고, 기발한 묘수를 생각했다. 바둑과 비슷한 두뇌 게임에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경쟁하면서 둘은 어느새 절친이 되었다. 혼자 공부하는 게 익숙했는데 함께 하니까 더 즐거웠고,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다 보니 실력이 나날이 늘었다. 중민이를 긴장시켰던 경쟁자는 게임을 통해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열일곱 살 운우와 2년 선배인 순표는 서울농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필드에 설 기회가 거의 없었다. 듣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축구처럼 팀워크가 중요한 단체 경기에서는 들을 수 없다는 게 치명적이었다. 패스하라고 외치는 동료 선수의 부름도, 지시를 내리는 감독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상의 필드에서는 180도 바뀐다. 듣지 못한다는 게 온라인 축구 게임에서는 오히려 장점이 된다. 청각 대신에 남들보다 빠르고 정확한 눈으로 상대 선수의 허점을 노리고 골문을 파고든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경기장 밖에서 혼자 놀아야 했던 운우와 순표는 지금, 누구보다 발 빠른 주전 선수가 되어 경기장 한복판을 누비고 있다.
게임이 바꾼 장애 학생들의 놀라운 변화. 지난 9월 9일부터 10일까지, 강원 홍천에서는 천여 명의 장애 학생들이 게임을 즐기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겨루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장애 학생들의 게임 올림픽이라 불리는 ‘전국 장애 학생 e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전국 장애 학생 e페스티벌은 2005년에 처음 시작해 올해로 스무 살을 맞았다. 이 행사는 장애 학생의 정보화 역량을 강화하고 건전한 디지털 여가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마련한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특수교육 정보화 행사다.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난 현준이는 늘 웃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경기에 대한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걸까. 한창 경기를 이어가던 중, 갑자기 경기 중단을 요청하는 현준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승패가 엇갈리는 순간, 게임에서 이겼을 때의 성취감은 장애 학생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는다. 졌을 때의 좌절감을 통해 실패를 이기는 법을 배운다. 함께 경기하면서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배려할 줄 아는 마음도 챙긴다.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상의 변화. 그 변화는 가상의 세계를 넘어 내일의 현실을 살아가는 힘이 될 것이다. 장애 학생들이 게임을 통해 만나게 될 세상을 지금부터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