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여름, 29년 동안 봉인돼 있던 투표함 하나가 열렸다. 상자 안의 표는 4,325장. 조작도 위조도 없었다는 결론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재개표를 주관한 강원택 서울대 교수에게는 의문이 남았다. "왜 선관위가 스스로 재개표를 못하고 정치학회에 의뢰를 했나."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이 생겼다. 용지가 모자랐던 송파구 투표소들의 표가 보관된 개표소 앞을, 시민들이 247만여 장을 다시 열라며 석 달 넘게 봉쇄하고 있다.
2026년 6월 3일, 전국 9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 7,194장이 모자랐다. 26개 투표소는 투표가 중단됐고, 용지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 사무 실패에서 시작된 의심은 선거 전체로 번지고 있다. 3·15 부정선거와 4·19 혁명 위에 세워진 선거관리위원회. 권력으로부터 선거를 지키기 위해 '독립'이라는 이름의 성벽을 두른 지 63년, 그 성(城)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추적한다.
그해 12월 16일, 16년 만에 치러진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투표율 89.2%라는 큰 국민적 관심 속에 치러졌다. 그런데 서울 구로구을에서 시민들이 투표소를 빠져나가는 트럭 한 대를 막아섰다. 짐칸에서 나온 것은 부재자 투표함, 상자 안에서는 도장까지 발견됐다. 경찰이 투입돼 천여 명이 연행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크게 다쳤다. 하지만 문제의 투표함은 당락에 영향이 없다는 이유로 끝내 개표되지 않았다. 29년을 건너뛴 재개표는 선관위 대신 '정치학회 주관'이라는 틀을 빌려 진행됐고, 조작은 없었다는 결론과 함께 선관위의 절차 문제도 함께 묻혔다. 취재진은 강 교수를 다시 만나, 그때 미뤄진 질문이 왜 10년 만에 되돌아왔는지 물었다.
선관위는 선거 때마다 투표용지를 선거인 수보다 적게 인쇄한다. 이번 지방선거의 하한선은 유권자의 절반, 50%였 다.
2009년 80%였던 이 수치는 한 번도 오른 적 없이 내려왔고, 취재진이 확인한 근거 자료에 적힌 것은 '예산 낭비'와 '폐기 부담' 걱정뿐이었다. 취재진은 직전 2022년 지방선거의 투표소별 선거인 수와 투표자 수 자료를 확보해, 전국 1만 4,465개 투표소에 50% 기준을 그대로 적용해 봤다. 용지가 부족해질 것으로 분석된 투표소는 154곳. 이 가운데 17곳에서 이번 선거에 실제로 투표용지가 바닥났다.
사고가 터진 뒤 선관위 자체 감사에서, 결정에 관여한 사람들은 이렇게 답했다. "약간 서로 믿다 보니 발생한 일인 것 같습니다." 선관위는 주요 사안을 의결하는 위원회와 실무를 맡는 사무처로 나뉘는데, 인쇄율 50% 결정은 사무처 전결로 처리됐다. 위원장은 현직 법관이고 위원 상당수는 본업이 따로 있어 선거 사무를 잘 모른다. 국회 국정조사에서 전 중앙선관위원장은 "기억이 안 났다"고 했고, 송파구 선관위원장은 50%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이해를 못 했다"고 답했다. 그렇게 내려진 결정이 전국의 투표용지 수량을 좌우했다.
선관위는 선거 때 극단적으로 팽창하는 조직이다. 상시 직원은 3천여 명에 불과하지만, 전국 투·개표소의 단기 인력 40여만 명을 지휘한다. 정작 투표소에 선관위 직원은 잘 없다. 6월 3일, 송파구선관위에서는 직원 13명이 단기 인력 2,900여 명을 총괄했다. "실수가 발생이 안 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는 현직 직원의 말처럼, 그날 투표소 담당자들의 단체 대화방에는 답을 받지 못한 다급한 메시지만 쌓여갔다.
같은 날, 경기도 김포에서는 또 다른 사고가 조용히 진행 중이었다. 구래동 아홉 곳 투표소에서 한 시간 동안 투표한 사람이 모두 '한 명'으로 기록됐다. 한 파견 공무원의 입력 실수로 오후 1시에 이미 80%에 육박하는 투표율이 나오자, 김포시선관위는 상급 기관에 수정을 요청했다. 돌아온 답은 "수정하지 말라"였다. 중앙선관위는 오히려 숫자를 다른 투표소에 분산해 입력하라며, 고쳐 쓸 숫자까지 엑셀 파일로 내려보냈다. 직전 대선과 총선까지 살펴보니 110여 곳에서 실시간 투표율을 허위로 입력한 정황이 나온다. 취재진은 비슷한 일이 벌어졌던 일본 도쿄 오타구의 전직 선관위 직원, 그리고 투표용지 부족으로 총선 일부가 무효가 된 독일 베를린의 선거관리관을 만나 '은폐의 문법'을 물었다.
KBS 미디어연구소가 전국 성인 남녀 2,120명에게 물었다. 선관위 신뢰도는 4점 평균 1.84점으로, 조사한 10개 기관 가운데 8번째였다. 검찰과 언론보다 낮았다. 이번 지방선거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44.1%로, 공정했다는 응답(32.1%)을 앞섰다. 응답은 지지 정당에 따라 극단적으로 갈렸다. 선거가 공정했다는 평가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에서 60.0%,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9.9%였다. 고의가 아닌 단순 오류라 하더라도 선관위 신뢰가 낮아진다는 응답은 62.8%에 달했다.
‘K-선관위, 무너진 캐슬’은 9월 8일 밤 10시 KBS 1TV에서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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