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봄기운에 어느새 봄 처녀로 돌아간 어머니들. 고단한 여인들의 삶에 따스한 위로가 되어 주었던 봄날의 밥상을 만나 본다.
거친 산줄기를 넘어오느라 봄이 늦게 찾아온다는 경상북도 봉화군의 두동마을. 백두대간이 병풍처럼 둘러싼 이 마을에도 샛노란 산수유꽃이 봄소식을 알리자, 이재남(63세) 씨는 동네 어르신들과 함께 들로 나선다. 평생 봄나물을 뜯으며 살아온 여인들은 잡초가 아닌가 싶은 풀들 가운데서 나물을 단번에 찾아내는 ‘나물 박사’다.
험준한 백두대간에 둘러싸인 탓에 땅도 좁고 농사철도 한 달 늦게야 열렸다는 두동마을. 쌀은 고사하고 잡곡도 구하기 힘들어 나물로 끼니 삼았다는 이 동네에서 어머니들은 ‘밭의 고기’라 불릴 만큼 단백질이 풍부한 콩을 가루 내 나물에 묻혀 맛과 영양을 보충했다. 가족들을 조금이라도 더 배불리 먹이려는 어머니들의 간절함이 찾아낸 지혜다.
알곡 한 톨이 귀하던 시절, 봄보리라도 수확하면 꽁보리밥에 나물을 올려 비빔밥을 만들었다. 씹는 맛이 거칠었던 보리밥에 봄나물을 넣으면 식감도 부드러워지고 소화도 잘되었단다. 비빔밥의 화룡점정은 사연 많은 눈물의 꽃, 산수유꽃이다. 산수유 열매는 한방의 귀한 약재로, 어머니들은 치아가 망가지고 손톱이 갈라지도록 열매의 씨를 발라냈단다. 추운 겨울 끝에 봄이 오듯, 고단한 세월을 건너 인생의 봄을 맞은 여인들에게 봄 밥상은 아름다운 추억이고 그리움이다.
자연이 곧 밥상이 되는 봄, 설렘을 주체할 수 없는 여인들이 산을 찾았다. 함께 모여 약초 음식을 배우는 이들에게 4월의 산과 들은 봄나물의 천국. 꽃도, 나무의 새순도 봄을 담은 소중한 먹을거리다. 약초 연구가로 활동 중인 최금옥(70세) 씨는 “자연을 알면 굶어 죽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녀와 회원들에게 봄나물은 배고프던 어린 시절에 먹던 구황식물이자, 나이가 들수록 더 그리운 봄의 맛이다.
어머니가 해주셨던 방식으로 끓이는 원추리 된장국. 보통 원추리는 독성을 제거하기 위해 한소끔 끓여 낸 뒤, 하루 동안 물에 담가두는데 해독 효능이 있는 감초물에 끓이면 그 시간을 아낄 수 있다. 어머니는 육수를 꼭 명태로 내곤 하셨는데, 그 당시만 해도 명태가 많이 잡혀 값이 저렴했다. 팔팔 끓는 원추리 된장국에 들깻가루까지 뿌리고 나면 옛날에 먹던 어머니의 맛이 완성된다. 바로 이 맛 때문에 늘 애타게 봄을 기다리게 된단다.
어머니가 자주 해주셨던 음식 중에는 봄꽃으로 만드는 부침개도 있었는데, 오늘은 시대에 맞춰 피자로 만들어본다. 생강나무꽃, 진달래 등 각종 꽃과 나물을 넣은 뒤, 돼지기름에 지글지글 익히는 봄꽃 피자. 기름이 귀했던 시절, 어머니는 늘 부침개를 할 때면 돼지비계를 사용했는데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은 늘 몸에 좋은 것이었다.
봄나물만으로는 영양이 부족해 이를 보충해 주던 돼지감자로는 강정을 만든다. 맛이 없어 주로 돼지 먹이로 쓰였다는 돼지감자였지만, 먹을 게 없다 보니 아이들도 돼지감자를 캐 먹으며 놀곤 했다. 물질적 풍요 속에 살면서도 허기를 달래느라 먹던 소박한 음식들을 찾게 되는 건, 어린 시절의 봄날이 그립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을 살아갈 힘을 주는 봄기운 가득한 밥상을 만나본다.
동해안의 작은 항구인 심곡항. 6.25 전쟁 때조차 전쟁이 난 줄 모른 채 지낸 오지였다는 이 마을에도 봄이 찾아왔다. 매서운 바람에 물빛마저 무겁던 겨울 바다와 달리, 봄을 머금은 바다는 한층 맑아져 파도마저 설레는 듯하다. 바다가 따뜻한 햇살을 듬뿍 받는 봄은 해조류가 빠르게 자라는 최적의 수확기. 절친한 동네 이웃인 손춘연(59세) 씨와 한순애(60세) 씨의 봄날도 분주해졌다. 큰 바위가 많고 영양분이 풍부한 고성과 강릉 사이의 청정바다는 바다 봄나물의 보고. 특히 이곳에서만 난다는 고르매 나물은 2월에서 4월 사이에만 수확할 수 있어 귀한 손님에게만 대접하는 봄철의 별미다.
고르매 나물은 생으로도 먹지만, 심곡항 사람들은 더욱 깊고 풍부한 맛을 위해 김처럼 발에 널어 말린다. 이곳에 시집온 지 60년이 됐다는 김봉녀(85세) 씨에게 고르매 나물은 삶, 그 자체였다. 많을 때는 호롱불을 밝혀놓고 밤새 고르매를 붙인 뒤, 아침이면 무거운 고르매를 머리에 이고 아이를 업은 채 10리(약 4km) 길을 걸어 나가 고르매를 팔아 쌀과 바꿔 왔다. 그렇게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어머니에게서 딸로 이어지며 지켜온 향토음식이 고르매 나물인데, 기름에 살짝 튀겨내면 입맛에서 사르르 녹으며 고단함을 달래준다.
돌미역은 ‘창경바리’라는 전통 어업 방식으로 채취한다. 남편이 노를 저으며 ‘창경’이라는 어구로 바닷속을 살핀 후 바위에 붙어 있는 돌미역을 베어내면, 물을 잔뜩 머금어 묵직해진 돌미역을 배 위로 끌어 올리는 일은 아내의 몫. 채취 이후에도 쉬지 못한 채, 돌미역을 가지런히 펴서 3일간 해풍에 잘 말려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아끼며 종종걸음쳐야 했던 봄날, 그래도 영양이 풍부한 돌미역회무침 한 그릇이 있어 다시 일터로 돌아갈 힘을 얻었단다. 한평생 열심히 살아낸 심곡항 사람들의 노고에 건네는 봄 바다의 위로를 담은 밥상을 만나 본다.